활자로 만나는 여행

목숨을 걸고 신념을
지킨 충정공 박심문

부조묘에서 충절정신을 배우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복음 5:37).”
다수의 사람이 ‘예’라고 말하거나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상황에서 ‘아니오’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분명히 불편한 이목을 끌게 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지만 ‘아니오’라 해야 할 때 ‘아니오’라 말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저 용기가 없어서 가만히 있는 거라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고 생각하지만,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거라 하신다.
안성시 대덕면 대농리에 목숨을 걸고 ‘아니오’라 하며 신념을 지킨 충정공 박심문(1408~1456) 선생의 부조묘가 있다.
시민명예기자 이원희
곧은 충성과 굳센 절개에
옷깃을 여미게 하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亂)으로 김종서 등이 살해되자, 박심문 선생은 이에 분개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임진강 나루터로 집을 옮겨 살며 성삼문, 하위지, 이개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하였다. 세조 2년에 명나라 수도 연경(지금의 베이징)으로 가는 사신을 수행하는 질정관(質正官)으로 임명받았다. 몇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피할 수 없어 떠나게 되었지만, 단종 복위 운동에 함께 합류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명나라 사신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서 사육신 등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며 “내가 육신(사육신)과 더불어 죽기를 맹약한 일이 있었다. 이제 모두 죽었는데 어찌 혼자만 살 수 있으며 산다 한들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선대왕을 뵐 수 있겠는가? 오늘 내 뜻은 이미 정해졌다. 사육신을 따르기로 했으니 비문(碑文)에는 반드시 전 임금 때의 벼슬만을 적게 하라. 그러니 내 벼슬은 예조정랑(禮曹正郞)이니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사육신(死六臣)과 충정공
박심문을 포함한 사칠신(死七臣)
사육신이 처형된 뒤 225년이 경과한 후에 이들을 추모하고자 민절서원을 창건하고 1682년에 신도비를 건립하는 등 이들에 대한 신원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충정공에 대한 복권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순조 4년에 ‘곧은 충성과 굳센 절개는 육신보다 못하지 않다(貞忠苦節 不下六臣)’라는 여덟 글자를 임금께서 친히 쓰시어 사액(賜額)를 내리셨으며, 사육신과 충정공을 포함하여 사칠신(死七臣)이라 해야 한다며,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늦게나마 신원이 회복되었다. 1905년(고종 42년)에 충신 박심문의 신주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不祧之典: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모셔 제사 지내게 하던 특전)을 허용하고 사패지(賜牌地:임금이 내린 땅)를 하사하였다. 그리하여 안성시 대덕면에 부조묘를 건립하고 음력 10월 11일에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를 지내고 있다.
현창문(顯彰門)
경절문(景節門)
부조묘(안성시 향토유적 제5호)
부조묘는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으로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된다. 박심문 선생의 부조묘는 현창문(顯彰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외삼문을 앞으로 하여 숭의당(崇義堂)과 경절문(景節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내삼문(內三門), 충정묘(忠貞廟) 등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으며, 현재 있는 건물은 1980년대에 중건되었다. 숭의당은 종친들의 제사 준비와 회의용 건물로 사용되며, 충정묘에는 박심문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맞배지붕에 한식 골기와를 얹은 건물로 정면 6.3m, 측면 3.3m 규모다.
충정묘(忠貞廟)
충정묘 내부
  • 안성시 대덕면 대농2길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