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로 만나는 여행

남사당을 대중공연으로 발전시킨
여성 꼭두쇠 ‘바우덕이’

최고가 된다는 것은 실패를 계속하면서도 불가능을 넘어서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전진하는 일이다.
노력을 다하며 최고가 되는 것이 제1의 명제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만은 않다.
누구나 다 세계 최고가 될 수 없으니 자신의 핵심 가치를 찾아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맛있는 커피를 만들 수 있을지 연구하고, 농사짓는 분은 어떻게 하면
당도 높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유일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남사당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여성 꼭두쇠가 있다. 자랑스러운 그 이름 바우덕이다.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암덕(岩德)이기에 岩을 바위로 풀어 바우덕이라 불렸다.
기자 이원희
바우덕이 사당
줄타기 재주가
당대 최고의 경지에 달한
바우덕이
바우덕이(김암덕)는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의 불당골에서 1848년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났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머슴을 살던 아버지가 병에 걸려 사망하면서 다섯 살에 안성 윤치덕 남사당패에게 맡겨진다. 안성 남사당패는 안성 청룡리를 본거지로 하여 봄부터 가을걷이 때까지 전국을 돌며 공연하고 겨울이면 본거지인 청룡리(청룡사)로 돌아와 연습하며 은신하는 기예 유랑 집단이었다. 바우덕이는 이 패에 섞여 살면서 염불, 소고춤, 풍물, 줄타기 등 남사당의 모든 기예를 익혔다. 타고난 천부적 재능으로 배우는 것이 남들보다 빨랐으며, 뛰어난 미모에 옹골찬 소리 가락과 산들산들 바람을 타는 줄타기 재주는 당대 최고의 경지에 달했다. 신기에 가까운 재주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바우덕이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바우덕이 사당
바우덕이 동상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 여성 꼭두쇠
모든 단원들로부터 신임을 얻었던 바우덕이는 윤치덕 꼭두쇠가 죽자 그녀 나이 15세에 단원들의 만장일치로 꼭두쇠로 선출된다. 그녀가 이끄는 안성 남사당패는 전국 어디를 가든 인기가 많았고 단원들도 최고 80여 명에 이르렀다.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지친 노역자들을 위로하고자 전국 남사당패를 한양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안성의 남사당 바우덕이패가 가장 즐겁고 뛰어난 재주를 보여주어 흥선대원군은 바우덕이에게 당상관이란 정 3품에 해당하는 옥관자(玉貫子)를 수여했다. 이 옥관자를 두레기 위에 달고 그 깃발 아랫부분에 오색삼기(五色三旗)를 달고 위세를 자랑하였다. 다른 농악대의 두레기1)가 이 깃발을 만나면 깃발에 절(기세배旗歲拜)을 하며 예우를 갖추었기에 안성 농악패를 영좌농악대(領座農樂隊)라고 칭하게 되었으며, 안성 농악을 영좌농악이라 한다.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묘
(안성시 향토유적 제38호)
바우덕이는 이후에도 전국을 돌며 남사당을 대중공연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힘든 유랑 생활 속에 폐병을 얻어 2년여 동안 이경화란 사내의 병수발을 받다가 1870년 23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다. 바우덕이가 죽자 남사당 단원들은 청룡리 개울가 양지바른 곳에 안치하고 장례를 지냈다. 현재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산1-1번지에 바우덕이 무덤이 있다. 바우덕이의 넋을 기리기 위해 남사당패의 근거지이자 바우덕이가 기예를 익힌 서운면 청룡길 128-29에 2005년 9월 바우덕이 사당이 건립되었다.
바우덕이 묘

바우덕이 사당

  • 위치 안성시 대덕면 대농2길 28

1) 두레는 농민들이 농번기에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하여 마을 단위로 만든 조직이며, 두레기는 두렛일을 할 때 풍악을 울리면서 세우고 가는 깃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