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시 탐구생활

한국 천주교의 발전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곳,
‘안성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성당’

2022년 12월 20일, 문화재청에서 ‘안성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성당’의 국가등록문화재 등록을 예고했다.
문화재청은 ‘안성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성당’이 한국 최초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성당 및 묘역들인 만큼 해당 유구들을 통해 한국 천주교의 발전 역사를 확인할 수 있어 가치가 있다고 발표했다.
또한 기념성당의 원형이 잘 유지되어 있고, 성당 앞에 위치한 묘역들이 성당의 상징성과 장소성을 더욱 잘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시민명예기자 배은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어떠한 일생을 살았을까?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36년 조선으로 들어와 경기도와 충청도 등지를 돌면서 신자들에게 영세를 주던 프랑스 출신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 신학교로 떠났다. 이후 마카오에 도착한 이후 약 4년 6개월 동안 라틴어와 철학을 비롯한 신학교육을 받았다. 1844년 12월,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사제 전 단계)을 받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 신부는 조선으로 돌아온다. 이후 조선에서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 준비와 조선 순교사를 집필했고 1845년 4월 30일 11명의 교우 및 예비 교우들과 함께 페레올 주교를 데리러 상하이로 향한다. 상하이에 도착한 6월 4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사제에 서품된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부가 탄생한 역사적 순간이다. 그는 한국에서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며 활동을 계속하다 1846년 체포되었고 같은 해 9월 15일 순교했다. 순교 당시 인근에 있던 신자들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를 몰래 빼내 현재의 미리내 성지에 안장했다. 이처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한국 최초 천주교 신부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국 천주교에 일생을 바쳤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성당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성당
‘안성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성당’은
어떻게 건립되었을까?
1921년,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 첫 사제이며 순교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 건립을 결정하였다. 이에 미리내 본당의 초대 주임 강도영 마르코 신부는 “불과 몇 시간 동안 계시다가 치명하신 새남터보다는 긴 세월을 묻히고 살이 썩은 미리내에 세워져야 합니다. 김 신부님의 시신을 모셔 온 미리내 교우들의 열성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미리내에 세워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마침내 1927년 미리내에 기념관 건립이 결정되었고, 1928년 봄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7월에 완공되었다. 완공된 ‘안성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성당’은 길이 8m, 너비 4m의 고딕 성당이며 기념성당 제대 아래에는 김대건 신부의 아래턱뼈와 척추뼈가 모셔져 있고, 나무 관 조각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해당 성당은 전국 성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순례지인 미리내 성지에 위치해 미리내 성지순례의 절정으로도 손꼽힌다.
‘안성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성당’은 단순히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묘 옆에는 김대건 신부의 스승이었던 ‘페레올 요한 요셉 주교’, 한국 세 번째 사제이자 미리내 성당 초대 주임신부인 ‘강도영 마르코 신부’, 미리내 성당 3대 주임신부인 ‘최문식 베드로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을 미리내로 운구한 ‘이민식 빈첸시오’까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관련 인물들도 안장되어 있다. 또한 은이성지부터 미리내 성지까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교우들을 위해 사목적 열정을 불태우던 사목활동로이자 시신이장로인 ‘청년 김대건 길’도 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성당의 개방 시간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다. 11월부터 3월까지는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만 개방한다. 김대건 신부 묘역 앞 광장에 있는 안내소에 문의하면 해설을 들을 수 있다.